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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인왕산 호랑이 잡던 명포수들, 일제에 총 뺏기고 몰이꾼 전락

서울의 무악재가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넘었다 하여 모아재로 불리던 시절. 호환(虎患)은 구중궁궐 속 제왕마저 떨게 만들었다. 1893년 12월12일(음력) 임금이 직접 지휘하는 친군(親軍) 소속 모든 병영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장위영.총어영.통위영.경리청이 포수를 풀어 호랑이를 잡겠다며 다투어 올린 보고들이 그득하다. 호환은 그 시절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들이닥칠 수 있는 일상사였다. 공포의 화신 호랑이에게도 천적은 있었다. 중국에서 높은 값으로 거래되는 뼈와 가죽을 노린 호랑이 사냥꾼들이다. 1900년께 서울 근교 산자락에서 짚신 신고 장죽 물고 화승총을 어깨에 멘 채 당당히 버텨 선 세 사람(사진)은 제법 명성을 떨친 명포수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 이들은 더 이상 총을 들 수 없었다. "일인이 병기를 금하여 어느 사람이든지 감히 총을 사용치 못한다. 이제는 산중 영웅이 서울 남대문까지 종종 심방하며 짐승을 만나는 사람은 죽지 않으면 물려갈 뿐이라." 1914년 5월6일자 '국민보'는 무력저항을 우려한 일제가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함으로써 호환이 서울 도심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 상황을 전한다. 그때 담대했던 호랑이 사냥꾼들은 신식 연발총을 든 일본인과 서구인 엽사들의 몰이꾼으로 전락했다. 1917년 11월14일자 '매일신보'는 일본인 정호군(征虎軍) 100여 명의 입국을 보도했다. 한 달여 동안 이들은 2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 1930년대 이후 이 땅에서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궁중과 산중의 제왕을 모두 제압한 일제는 요순우탕(堯舜禹湯)에 이어 맹수를 몰아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준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아니었다. 그때 일제는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을 위협한 또 다른 모습의 포식자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30

[그때와 지금] '철혈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 도입

1898년 7월30일 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비스마르크(사진)가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사회정책을 실시해 독일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1871년 통일 직후 독일제국은 한동안 호황을 누렸지만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으로 주가의 대폭락 수많은 기업의 도산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겪었다. 급속한 공업화의 결과 1871년 인구의 20%를 점유했던 노동자의 수는 1880년대 초 인구의 25%로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장기 불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이는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급증하는 요인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8년 10월21일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을 통과시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0년까지 갱신.유지됐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도 사회주의 지지도는 계속 높아지기만 했다. 이런 현실에서 비스마르크는 법을 통한 강압만이 사회주의에 대한 완벽한 대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즉 국가가 적절한 사회정책을 펼치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한다면 노동자들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사회입법의 취지를 담은 황제교서를 낭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보호 및 부양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그 후 약 10년간 광범위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위험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한편 '선량한' 노동자들을 포섭함으로써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권위주의적 사회정책이었다. 이른바 '사탕과 회초리' 정책이다. 물론 이런 권위주의적 정책으로 참다운 국민 통합이 이뤄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위대한 전환'이었고 그 후 각국 사회보험제도의 본보기가 되었다. 1884년 오스트리아에 이어 1893년에 이탈리아 1901년 스웨덴.네덜란드 등지에 이와 유사한 제도가 등장했다. 지난 5월30일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상위 20% 소득과 하위 20% 소득의 격차가 2000년 전국 가구 소득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가장 컸다. 하지만 우리나라 복지지출 규모는 GDP의 9% 안팎으로 OECD 평균 21%에 비해 12%포인트 낮다.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의 사회정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을까.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29

[그때와 지금] 왕조의 운명 저물어가던 무렵, 홍릉 석상에 올라탄 '미국 공주'

1905년 7월 29일 도쿄에서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 평화에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그때 미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한국을 넘기는 대신 필리핀 지배를 약속받았다. 러일전쟁이 터진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당연시했다. 1905년 1월 뤼순(旅順)이 함락되자 열강은 일본의 승리를 점쳤다. 6월 열강은 미국에 러.일 두 나라의 강화를 조율해 주길 요청했다. 8월 9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일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12일 영국은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어 일본의 손을 들어 줬다. 9월 5일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에서 패전국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했다. 9일 프랑스가 '루비에-버티 협의'를 통해 한국 문제에 대한 영국의 조처를 받아들였다. 27일 빌헬름 2세도 독일이 극동에서 미국과 보조를 같이하기로 루스벨트와 합의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해 국제적 합의가 끝나 가던 9월 19일.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이 땅에 왔다. 대한제국 황제는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미국 공주'를 극진히 환대했다. 일본의 만행을 알리려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에서 환영만찬을 열었지만 그녀는 능을 지키는 돌짐승에 마음을 뺏겼을 뿐이다. 석마(石馬)에 올라탄 그녀의 모습(사진)은 도와줄 이 아무도 없던 대한제국의 아픈 현실을 상징하는 소극(笑劇)이다. 남의 힘에 기대 생존하려 했던 한 세기 전의 슬픈 역사는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28

[그때와 지금] 반세기 전엔 한 방에 여덟 식구···'파리의 지붕 밑' 심각한 주택난

1930년대 초 프랑스 인구의 상당수는 단칸방 또는 서로 통하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두 칸인 경우 한 칸은 부엌이었다. 39년까지 거의 모든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지만 상수도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공동 우물을 많이 이용했다. 욕실은 당연히 없었고 개수대 위에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혼자'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변을 보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도 가족에게 보여야 했다. 그게 부끄러우면 돌아앉으라고 부탁했다. 광산 사택에서는 거실에 나무 함지박을 들여놓고 부인이 난로 위에 물을 끓이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광부는 거실에서 부인의 도움으로 몸을 씻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20세기 전반 내내 지속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택이 부족했던 것이다. 양차대전 사이(1919~1940)에 지어진 주택은 200만 채에 불과했다. 세입자 보호와 물가상승 억제를 위해 제1차 세계대전 후 채택한 임대료 규제정책으로 임대료가 너무 낮은 수준에 묶이는 바람에 지주들은 임대주택 건설에 흥미를 잃었다. 53년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주택 사정은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놀랍게 좋아졌다. 53년에 지어진 신규 주택은 10만 채를 넘었고 59년에는 30만 채 65년에는 40만 채가 건설되었다. 이어 민간자본도 주택 건설에 참여했다. 72~75년에는 매년 50만 채 이상이 건설되었다. 이 4년 동안 건설된 물량이 19~40년에 지어진 물량보다 많았다. 집이 없던 수백만 프랑스 가족들에게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현대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60년에도 비좁은 주거공간에서 사는 서민들은 여전히 있었다(사진). 보통 한 침대에 세 명씩 잠을 잤다. 방에는 빨래가 널렸고 옷장 위에는 라디오가 놓여 있다. 창문 옆 구석에는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다. '패션과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화려한 이미지 뒤에 감춰진 서민들의 삶은 그리 풍족지 않았다. 물론 그 시절 우리는 훨씬 더 힘겨웠지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27

[그때와 지금] 18세기 유럽의 골동품 수집 붐···위조 미술품 거래도 '호황'

얼마전 경매장에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병풍 그림 화첩평생도가 추정가 4500만~6500만원에 나왔다. 고미술 전문가가 한마디 했다. "김홍도의 8폭 병풍이 4500만원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진짜 김홍도 작품이라면 4500만원이 아니라 5억 10억원이 넘어야죠." 이 병풍의 진위와는 별도로 고미술.현대미술 할 것 없이 한국 미술계가 지난 몇 년 동안 위작 소동으로 크고 작은 홍역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18세기 유럽에서도 가짜 미술품 소동이 흔했다. 귀족계급이 다투어 해외여행에 나선 '그랜드 투어'가 본격화되자 많은 유럽인이 이탈리아에 가서 미술품을 수집했다. 관광안내원들은 이탈리아 화가.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객과 예술가 양쪽으로부터 수수료를 챙겼다. 영국의 젊은 귀족들은 당연히 동향 사람에게서 물건을 구입할 때 더 안전함을 느꼈다. 웨일스 출신의 교활한 상인 토머스 젱킨스(1722~1798)는 고객들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로마의 대표적 골동품 취급상이었던 그는 구입 의사는 있지만 당장 현금이 없는 귀족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줌으로써 이중으로 이익을 챙겼다. 젱킨스는 연기력이 대단했다. 수십 배의 이익을 취하면서도 소장품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악어의 눈물이 따로 없었다. 유물 복원기술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조각난 고대의 토르소에는 감쪽같이 팔.다리.머리가 생겨났고 정교한 니코틴 처리를 거치면 그가 청구한 금액에 상응하는 고색창연한 얼룩이 생겼다. 그는 고객에게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객의 무지를 은근히 강조하면서 자신의 뛰어난 감식력을 과시했고 이렇게 고객의 기를 죽인 뒤 분위기를 틈타 주머니를 털었다. 물론 젱킨스보다 형편없는 사기꾼도 많았다. 그들은 싸구려 모조품에 터무니없는 값을 매겨 귀가 얇은 귀족들의 돈을 털었다. 여행자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작품에서 당대 이탈리아 화가의 수채화에 이르기까지 수천 점의 그림.조각상이 북유럽으로 반입됐다. 그 즈음 독일 화가 요한 조퍼니는 저명한 수집가 찰스 타운리(1737~1805 그림 맨 오른쪽 남자)가 그랜드 투어에서 수집한 미술품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렸다. 타운리 또한 젱킨스의 고객 중 한 사람이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24

[그때와 지금] 급여로 받은 쌀의 절반이 모래···분노한 군대, 임오군란 일으켜

근대사상 최초의 군사 쿠데타인 임오군란의 도화선에 불이 댕겨진 날은 1881년 7월 19일이다. 13개월이나 밀린 녹미 중 겨우 한 달치가 무위영 소속 군인들에게 주어진 그날. 모래가 반은 섞인 쌀을 손에 쥔 병사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대표 몇 명이 책임 당국자 민겸호의 집(사진)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징벌이었다. 병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23일 재집권을 읍소하는 이들에게 대원군은 민씨 척족의 수뇌를 제거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해 일본인을 몰아내며 범궐하여 민비를 없앨 것을 비밀히 지령했다. 24일 창덕궁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분노한 군민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워지자 하나부사 공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른 후 본국으로 도피했다. 다음 날 대원군이 9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올랐다. 수구(守舊)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대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8월 1일 청군 3000명이 이 땅에 들어오고 8일 300여 명의 일본군도 진주하자 임오군란은 국제 문제로 비화했다. 26일 대원군은 납치되어 청국 보정부(保定府)에 유폐되었다. 33일 만에 정권은 다시 고종과 민씨 척족의 손으로 돌아갔다. 일본은 군란을 빌미로 30일 수호조규 속약과 제물포조약을 강요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공사관 호위 병력의 주둔권을 얻어내는 등 실리를 챙겼다. 그러나 최대 수혜자는 청국이었다. 10월 4일 맺어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서문에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임이 명시되었고 청국 상인은 일본 상인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청.일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던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다름없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 같은 정치판을 보며 위정자들이 내우(內憂)는 외환(外患)을 부른다는 임오군란의 교훈을 되새기길 바랄 뿐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23

[그때와 지금] 100년 전 '목욕할 때도 몸 보지 마'···지금은 도처에 넘치는 여성 노출

프랑스 제5공화국을 건설한 드골 대통령의 부인 이본 드골(1900~1979)은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니던 여학생 시절 목욕할 때면 반드시 가운을 걸쳐야 했다. 자기 몸을 볼 수 없도록 하는 학교 규칙 때문이었다. 서양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 전통은 육체를 의심하고 심지어 비난하는 태도마저 갖게 했다.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육체는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누더기에 불과했다. 물론 육체는 존중돼야 하고 필요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죄 특히 육신의 죄를 범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목욕 등 몸단장은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물이 몸을 허약하게 만든다는 믿음도 널리 퍼져 있었다. 반면 몸의 때는 건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중.고교 기숙사에는 아예 목욕 시설이 없는 곳도 적지 않았다. 그 후 청결 관습은 사회 계층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산층의 아파트에는 대개 욕조가 딸린 욕실이 있었지만 서민들이 현대적 편의시설을 갖춘 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몸단장의 도구인 거울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19세기 프랑스 농촌마을에서 제대로 된 거울은 이발사만 갖고 있었고 남자들만 볼 수 있게 사용이 국한됐다. 여자들은 행상인들이 판매한 작은 거울을 사용했지만 고작해야 얼굴만 비춰 볼 수 있었다. 농촌 사회에는 거울에 대한 금기 사항까지 있었다. 이를테면 아이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키가 자라지 않으며 사람이 죽은 다음 날 거울이 펼쳐져 있으면 불행이 온다는 식이었다. 부유층에서는 거울이 일찍부터 사용됐다. 19세기 말에는 부부 침실 장롱 문에 거울이 등장했다. 그러나 규범에 따라 처녀 아이가 알몸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을 금지했다. 욕조 물에 비친 나신을 봐도 안 되었다.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 목욕물을 흐리게 만드는 특수한 가루까지 사용됐다. 하지만 이런 금기는 오히려 육체의 이미지가 갖는 관능적 자극을 더욱 고조시킬 뿐이었다. 상류층을 상대로 쾌락을 파는 장소에 거울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1890년에 그려진 '거울 앞에서'(그림=파리 장식예술도서관)는 전신거울 확산 초기 자아도취의 감정이 고조되던 세태의 단면을 보여준다. 거리마다 해변마다 노출이 넘쳐나는 계절에 바라본 100년 전 '그때'는 완연한 별천지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22

[그때와 지금] 청일전쟁 방아쇠 당긴 일본, 10시간 만에 유린당한 경복궁

1894년 7월 22일 밤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작전 목표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삼는 것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이 사건은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경복궁 점령은 일본이 파병을 결정한 5월 31일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가 함락되던 그날. 일본 내각은 의회에 의해 탄핵당하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일본은 내부의 위기를 밖에서 전쟁을 일으켜 해소하려 했다. 일본은 청군 3000명이 아산만에 도착한 다음 날인 6월 2일 7000명의 병력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7월 23일 0시30분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했다. 오전 4시20분 건춘문에서 시작된 교전은 10시간 이상 왕궁 이곳저곳에서 계속되었다. 조선군의 무장이 완전히 해제된 그날. 일본은 친일 괴뢰 내각을 구성하고 대원군을 다시 섭정으로 내세웠다. 친청 민씨척족은 정권에서 밀려났으며 국왕은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다. 7월 25일 일본군은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26일 청의 수송선을 아산 앞바다에 묻었다. 일본이 동양의 패자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청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청병을 조선의 국경 밖으로 철퇴시켜 조선국의 독립 자주를 공고히 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8월 26일 조인된 '대일본 대조선 양국 맹약' 1조는 이 전쟁이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8월 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던 만리창으로 개선하는 일본군을 담은 사진(독립기념관 소장) 속 일장기와 나란히 걸린 태극기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의 독립을 훼손한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그해 가을 항일의 기치를 다시 들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21

[그때와 지금] '신데렐라 복서' 제임스 브래독, 대공황기 서민들의 영웅 되다

대공황의 그늘이 짙어만 가고 있던 1935년 6월 13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경기장에서 권투 역사상 보기 드문 세기의 결전이 벌어졌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 맥스 베어(오른쪽)와 도전자 제임스 브래독(왼쪽.1906~74)은 시합 시작 몇 시간 전 체중 검사를 했다. 베어는 멋진 몸매에 매력과 재치가 넘치는 사람으로 복서라기보다는 만인의 연인이었다. 뉴욕 일류 호텔에 살면서 멋진 야회복을 차려입고 화려한 레스토랑과 호화 나이트클럽을 오가는 그는 수프 배급을 받으려고 길게 줄 서 있는 거리의 풍경과 완벽한 대조를 보였다. 베어에게는 주식 폭락 같은 것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도전자 제임스 브래독은 대공황 때문에 좌절을 맛봐야 했다. 모아둔 돈은 대공황 초기에 다 날렸다. 자존심이 꺾인 채 배고픔에 시달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는 처음에는 부두 노동직을 찾아 나섰고 그런 기회마저 없을 때는 구제기금 신세를 졌다. 그러나 브래독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기사회생 했다. 부두 노동직과 정부 구호금을 뿌리치고 세계 챔피언 도전자의 위치로 도약한 것이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온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이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브래독은 해냈다. 브래독이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을 때 그는 역대 챔피언 중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대중에게 그토록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링에서 보여준 비범함이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브래독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민은 브래독에게 압도당했다. 이 완벽한 영웅! 겸손하며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이웃 친구 아내와 세 아이가 있는 훌륭한 가장 대공황의 희생자 너무나 가난해 구제 기금으로 살아야 했던 남자. 미국민은 패배자에서 스포츠 최정상에 오른 인물의 이야기에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포츠 동화의 원형이 된 브래독은 도전자 시절 '신데렐라 맨'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의 이야기는 2005년 러셀 크로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암울한 시대에 브래독은 서민의 영웅이었다. 역대 헤비급 챔피언 중 '보통 사람'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브래독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치맛바람.바지바람으로 만들어진 요즘 스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자연산' 영웅의 매력과 감동이 있었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20

[그때와 지금] '빨간 마후라' 원조 김영환 장군, 붉은 치마 옷감으로 머플러 급조

"빨간 마후라(머플러가 옳은 표기)는 하늘의 사나이…" 2006년 신상옥 감독의 장례식에선 공군 군악대의 연주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1964년 신 감독이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쟈 브라더스 노래)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서울 명보극장에만 22만 관객이 몰린 히트작이었다. 지난해 7월 3일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빨간 마후라'를 디자인했다. 1950년 일본 전투기 F-51 10대를 인수한 지 단 하루 만에 훈련도 없이 10명의 공군이 북한을 향해 출격한 '조종사의 날'을 기념한 것이었다. 왜 '빨간 마후라'는 공군의 상징이 됐을까. '빨간 마후라'의 원조는 김영환 장군이다. 제일고보(경기고 전신)와 일본 관서대 항공과를 졸업한 그는 초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 장군의 동생이다. 김영환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영웅 리히트호펜을 좋아했다. 리히트호펜은 붉은색으로 칠한 전투기를 몰고 다니며 연합군기 80대를 격추한 사람이다. 붉은 비행기 덕에 그의 별명은 '붉은 남작(Red Baron)'이었다. 김영환은 리히트호펜 스타일의 모자와 장화를 착용하고 다녀 '멋쟁이 바론'으로 불렸다. 그는 장난기도 심했다. 항공기를 몰고 한강 다리 밑의 교각 사이를 누비는가 하면 이화여대 상공을 저공 비행해 학교 측으로부터 "시끄러워 수업을 할 수 없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빨간 마후라'를 처음 두른 건 강릉 10전투비행전대 전대장 시절이었다고 한다. 형수(김정렬 당시 공참총장의 부인)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문득 리히트호펜의 붉은 빛깔이 떠올랐는지 "조종복과 잘 어울리겠는데요"라고 한마디 했다. 형수는 치마를 짓고 난 자투리 옷감으로 그에게 머플러를 만들어줬다. 다른 설도 있다. 추락한 아군 조종사를 수색하는 방안을 논의하다가 눈에 띄는 빛깔의 머플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강릉 시장에서 인조견을 사와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른셋의 나이로 제1훈련비행단장으로 재직하던 54년 그는 F-51을 몰고 사천에서 강릉으로 가던 중 실종됐다. 빨간 머플러를 두른 채 하늘로 사라져 '번개처럼 지나가는 청춘'이란 노래 가사처럼 영원한 전설이 됐다.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7-19

[그때와 지금] 식민사관 앞장선 조선사편수회, 기생·게이샤 끼고 봄나들이 즐기다

1915년 6월 박은식은 일제에 나라를 앗긴 아프디 아픈 역사를 기록한 '한국통사'를 펴냈다. 그는 식민지 사람들에게 나라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 다시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그의 외침은 고요한 연못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였다. 작은 동심원의 궤적들은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이 땅의 사람들의 가슴에 독립에 대한 열망이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이 책이 나온 지 한 달 만인 1915년 7월 '조선반도사' 편찬 작업에 나섰다. "사람 마음을 현혹시키는 이 책의 해독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를 멸절시킬 방책만을 강구하는 것은 헛되이 힘만 들고 성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전파를 장려하는 것일지 모른다. 금압하기보다 공명 적확한 사서로 대처하는 것이 첩경이다." 일제는 한민족을 일본에 동화시켜 다시는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하고팠다.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그때 이미 시작되었다. 1919년 거족적 3.1운동은 우리와 일본인은 본래 한 핏줄인 '동족'이니 일본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억설을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한 한국사 왜곡과 사료 편찬 작업은 계속됐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됐다. 편수회는 '조선사' 37권을 비롯해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책과 자료집을 무수하게 찍어냈다. 일제 강점기 어느 봄날. 따사로운 봄볕이 싫지 않은 듯 차양 밖에 자리 깔고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는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의 야유회 사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기생과 게이샤가 함께한 야유회 자리에서 단군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깎아내린 이마니시 류나 구로이타 가쓰미 그리고 일제의 회유에 절개를 굽혀 민족사 왜곡에 일조한 최남선과 이병도 등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역사 왜곡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다시 한 번 불을 뿜을 모양이다. 아직도 일본의 역사시계는 뒤로만 가려 한다. 역사 왜곡에 맞서 싸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이에나가 사부로가 새삼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17

[그때와 지금] '정쟁 격심하니 내 각제 바람직' 헌법 기초한 유진오의 선견지명

1945년 8월 15일 한국인의 정치 참여 기회가 철저하게 막혀 있던 일제 식민통치가 종언을 고했다. 미군정하 우후죽순 격으로 솟아난 정치단체마다 헌법의 제정을 위한 초안 작성에 부심하던 그때. 당시 유일무이한 헌법 전문가였던 유진오(1906~1987.사진)는 그의 능력과 식견을 해방된 조국을 위해 펼칠 기회를 얻었다. 47년 그는 법전편찬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최초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하에 실시된 총선거 결과 제헌국회가 출범하였다. 6월 3일 국회는 그를 헌법기초위원회 10명의 전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했다. 7월 12일 만장일치로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국회의 심의를 통과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렸다. 유진오가 만든 초안은 90% 이상 원안대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의 반대에 부닥쳐 그가 꿈꾸었던 권력 구조인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중심제로 뒤바뀌고 말았다. 정파 간 다툼으로 국정이 난맥상을 보이고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지듯 다시 일고 있는 오늘 '헌법의 아버지' 유진오가 남긴 고언(苦言)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나라의 격심한 정쟁의 현상으로 보아서도 이를 완화 또는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절대로 필요하며 그와 같은 인물이 없으면 정국은 파국적 단계까지 이를 위험성이 있으므로 실제적 견지로 보아서도 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가 정쟁에 초연한 원수를 가질 수 있는 의원내각제도로 추이하는 것은 희구할 만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통령제에 대한 그의 반론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 헌정사가 증언한다. 제헌절 61주년을 맞는 오늘 내각책임제를 꿈꾼 그의 선각이 마냥 그립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16

[그때와 지금] 중세 유럽인이 꿈꾼 '외계 나라' 대항해 시대 여는 촉진제 역할

안철수연구소의 설립자인 KAIST 안철수 교수가 얼마 전 TV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군대에서 손과 발이 작아 군화를 제일 작은 것을 신었으나 머리가 커서 철모는 제일 큰 것을 썼던 사실을 밝히며 "화성인 취급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우주 저 멀리에 사는 외계인이 인간과는 외모가 다를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통념이 잘 드러난 에피소드다. 요즘은 '지구 바깥'이 외계지만 15세기 말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전 유럽인에게는 '유럽 바깥'이 외계였다. 유럽 내부에 고립된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슬람세력은 러시아 스텝 지역에서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뻗으며 동쪽과 남쪽에서 유럽을 포위했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했다. 이교도에 둘러싸인 기독교 세계의 위기의식이 투영된 것일까. 15세기 유럽인들 사이에는 '사제 요한'의 기독교왕국 전설이 퍼져 있었다. 중세 전설에 따르면 사제 요한은 네스토리우스교 또는 콥트 기독교의 사제이자 왕이었다. 사제 요한의 왕국은 유럽을 포위한 이슬람세력 저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유럽인은 사제 요한을 찾아내 동맹을 맺을 경우 협공으로 이슬람세력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사제 요한의 왕국에 대한 유럽인의 상상력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곳에는 유니콘들이 뛰어다니고 사자의 몸통에 독수리의 머리.날개를 가진 전설의 동물 그리핀들이 황금을 지키고 있었다. 왕국에는 괴상한 모습의 인간들(그림)이 살고 있었는데 얼굴이 어깨 아래쪽에 달린 사람 부채 같은 거대한 발이 달린 외다리로 뛰어다니다가 낮잠을 잘 때는 발을 해 가리개로 사용하는 사람 새 머리가 달린 사람 허리 아래가 말처럼 생긴 사람이 있었다. 사제 요한은 이렇듯 기상천외한 별천지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성에 살았다. 중세 유럽인들은 사제 요한과의 '접속'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품고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중세적 꿈이 뜻밖에도 근대를 연 셈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보고에 따르면 태양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297개의 별 주위에서 모두 353개의 행성체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를 찾기 위해 앞으로 15년 동안 우주선들이 속속 발사될 예정이다. 21세기판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머지않아 외계인의 존재도 확인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외계인의 모습을 이런저런 기괴한 형상으로 멋대로 상상하곤 하지만 혹 지구 밖에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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